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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나온 책
제목 역사인물 인터뷰: 세계사인물 다시보기, 진시황에서 이토 히로부미까지
도서정보 최용범 지음 │ 13,500 원│ 분류 : 인문 / 역사 │ISBN 978-89-92920-51-3 03900

  “역사는 그들을 한쪽 눈으로만 봤다!

역사인물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

 



 

언론플레이와 여론 조작의 달인 나폴레옹?

카이사르에게 클레오파트라는 단지 첩이었나?

진시황이 중국사 최고의 황제였다?

카사노바가 1천 여 명의 여인과 사랑을 나눌 수 있었던 특급비책은?

조조는 관용과 용인술의 대가였다?

장보고가 대형 로비스트?

이토 히로부미가 온건파였다고?

 

30만 독자가 선택한 『하룻밤의 읽는 한국사』 저자 최용범의

세계사 인물 탐험!

 

30만 독자가 선택한 『하룻밤의 읽는 한국사』 저자 최용범이 쓴 『역사인물 인터뷰: 세계사인물 다시 보기, 진시황에서 이토 히로부미까지』. 책은 독재자, 역적, 요부 등 극단적 평가를 받고 있는 13명의 세계사인물들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해명하고 그들의 감추어졌던 진실을 이야기한다. 저자는 그들에게 또 다른 진실이 있지 않을까, 그들이 꿈꾸었던 세상은 어떤 것이었나, 그들은 일생을 통해 무엇을 찾고자 했는가, 또 어떤 것을 가장 소중히 여겼는지를 좌도 우도 아닌 한가운데의 시선으로 상상하고 읽어낸다. 그리고 그들의 치열한 삶에서 추출된 이야기들을 인터뷰라는 형식을 빌려 접근한다. 인터뷰는 인물을 둘러싼 특정 사건이나 상황의 생생한 분위기를 그대로 전해주는 매우 실용적 도구이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평면적으로만 인식되던 13명의 역사인물들은 피가 돌고 살이 붙어 목소리와 표정을 가진 입체적인 인물들로 생생하게 살아 움직인다.

 

1. 책 소개


 

뒤집어 보고 꺾어 읽는 역사,

오해와 편견의 역사인물 다시 읽기!

 

시공간이라는 거대한 매트릭스 안에 무수한 사건들이 기록된 역사의 강에는 언제나 차이와 반복의 물살이 때로는 거칠게 또 때로는 잔잔하게 흐르고 있다. 거대한 지각변동으로 인해 물줄기가 크게 바뀌기도 하지만 그 안의 미세한 진동들을 제대로 탐사한다면 인간과 삶, 시대를 폭넓게 통찰할 수 있고 그로 인해 “우리 시대의 방향 설정에 주요한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역사를 바라보는 시점의 차이는 분명히 존재한다. 그렇기에 모든 역사는 다의적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역사 인식에 대해 대다수의 사람들은 절대적 사고 패턴을 가지고 있다. 그것도 상식이라는 이름으로 너무도 쉽게 학습화되어있다. 특히 역사인물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이를 테면 ‘불로초, 아방궁, 만리장성, 분서갱유’로 인식되는 진시황은 잔혹한 폭군의 대명사로 각인되어 있다. 그러나 오늘날 진시황은 “난세의 위대한 리더이자 역사의 건설자”로 재평가되며 중국사 최고의 황제로 꼽힌다. “중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역사인물은 누구인가?”라는 중국 내 설문조사에서 거의 언제나 진시황과 마오쩌둥 두 사람이 1, 2위를 다툰다고 한다. 특히 마오쩌둥은 진시황을 중국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4명의 황제 중 한 사람으로까지 꼽았다.

절대적 사고 패턴에서는 오직 하나가 참이면 다른 하나는 거짓의 ‘이더 오어(either-or)’만 있을 뿐 제3지대, 제3의 시선은 인정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권력싸움에서 밀려났다면 분명 패자에게 큰 결함과 과오가 있을 것이다’라는 식의 사고만 가능하다. 참과 거짓 어느 한쪽만 보도록, 어느 한쪽만 믿도록 사고가 디자인되는(혹은 조정당하는) 것이다.

 

‘이더 오어(either-or)’의 역사에 물음표를 던지다

저자는 말한다. “우리 역사는 승자 중심의 논리가 너무 강했다. 이는 단지 기록의 문제만은 아니다. 승자의 기록인 정사에만 지나치게 의존했다. 패자 입장에서의 기록은 물론이고, 그 해석도 적었다. 승자가 모든 것을 차지하고, 패자는 나름의 정당성조차 잃고 부관참시당한다.”

그렇다. 역사의 표면에는 언제나 승자와 패자의 명백한 대비가 있다. 그러나 심층 구조의 측면에서 보면 패자에 대한 증오와 적대감, 온갖 약점을 권력으로 감추고 있는 승자의 자기중심적 시선이 드러난다. 물론 승자와 패자 사이에 팽팽한 대립각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래서 역사는 필요한대로 만들어 진다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는 기실 ‘서로’를 배제하고 ‘우리’만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승자에 의한, 승자를 위한, 승자의 권력사인 셈이다. 즉 역사는 패자를 불공평하게 다루고 승자가 힘주어 말하는 역설(力說)이요 힘의 기록인 역사(力史)다.

 

“정치권력을 둘러싼 싸움에서 승부를 결정짓는 것은 운칠기삼(運七技三)이란 말이 있듯, 정치사에서는 단지 실력만이 아니라 운이 더 큰 몫을 차지하곤 한다. 운명의 여신이 누구의 손을 들어주느냐에 따라 승패가 결정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 의미에서 운을 가졌던 승자만을 지나치게 챙겨주는 것은 기(技) 3은 다했건만 운(運) 7이 따르지 못해 좌절하고 만 역사 속 인물들의 피땀 어린 흔적을 간과하게 마련이다.”(본문 131~132쪽)

 

『역사인물 인터뷰: 세계사인물 다시 보기, 진시황에서 이토 히로부미까지』는 다양한 각도에서 본 역사인물 이야기다. 역사의 표면을 넘어서 역사를 만들고 간 사람들의 심층 구조를 접근한다. 무엇보다도 가상인터뷰라는 실용적 도구를 사용해 역사인물을 둘러싼 역사적 사료의 진위를 가리고, 역사인물에 대한 그릇된 오해를 해명하며 감추어졌던 진실을 새롭게 밝혀낸다. 인터뷰는 인물을 둘러싼 특정 사건이나 상황의 생생한 분위기를 그대로 전해주는 매우 실용적 도구이기 때문이다.

 

광해군의 역사적 실패가 주는 교훈은?

책에서 저자는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13인의 역사인물들(진시황, 클레오파트라, 조조, 측천무후, 장보고, 궁예, 정도전, 허균, 광해군, 카사노바, 나폴레옹, 명성황후, 이토 히로부미)을 통해 역사의 불공평함이 무엇이고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 상식이 객관적으로 타당한 것이었는지 물음표를 던진다. 그 과정에서 당연하게 여겨져 온 역사 상식 중 분칠된 것들이 무엇이었는지 지적한다.

가령 인조반정이라는 쿠데타를 맞아 한순간에 권좌에서 축출된 광해군. 그는 동생 영창대군을 살해하고 계모인 인목대비를 폐모시킨 패덕의 왕, 지나친 토목공사로 민심을 잃은 무능한 왕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광해군은 사대주의에 몰입된 신료들의 거듭된 반대에도 초강대국 명나라를 ‘주무르고’, 신흥 강국 후금(청)을 ‘달래는’ 탁월한 외교정책을 구사한 중립외교의 달인이었다. 임진왜란이 남긴 후유증을 극복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대동법 추진으로 민생안정에 주력했던 왕이었으며 또한 선조의 명이긴 했지만 광해군의 지원으로 동아시아 최고의 의학서인『동의보감』이 빛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광해군의 이런 치적들은 내치에서 정치력을 발휘하지 못한 결과 쿠데타를 맞아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저자는 광해군의 역사적 실패가 오늘날 우리하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현대적인 시각으로 분석한다. 광해군의 탁월한 외교정책은 왜 좌절됐고, 당시 그가 부닥쳤던 문제들은 구체적으로 무엇이었으며, 또 어떻게 대응했는가를 현미경적 시각으로 들여다본다. 아울러 저자는 광해군의 실패가 주는 역사적 교훈을 통해 특히 대북 정책과 관련해 지금 우리 시대 즉 “4대 강국의 틈바구니 속 한반도적 시야에서의 탁월한 외교력”은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한다.

 

언론플레이와 여론 조작의 달인 나폴레옹?

정복자의 대명사이자 전장의 최고지략가로 알려진 나폴레옹이 사실은 언론통제와 여론조작을 통해 권력을 유지하고 강화했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경력도 없는 코르시카 출신 대위가 일약 프랑스 군대의 총아로 떠오를 수 있었던 것은 1793년 툴롱 전투를 앞두고 자비로 출판한 『보케르에서의 저녁식사』란 책 때문이었다. 군대 대표위원들에게 자신의 책을 보낸 나폴레옹은 이들의 눈에 띄어 포병장교로 툴롱 전투에 참가해 큰 공을 세웠고, 일약 육군 준장으로 진급할 수 있었다. 이후 나폴레옹은 언론을 여론 통제의 수단으로 삼아 그를 적극 활용했다. 최고권력을 잡은 후 적대언론을 검열하고 폐간했으며 군대소식지를 만들어 정보조작을 일삼았다. ‘전황보고 같은 거짓말’이라는 비유가 생길 정도였다고 한다. 나폴레옹의 잘못된 언론관은 정부와 군, 저널리즘의 관계에 대해 지금 이 순간에도 여러 가지 시사점을 남긴다.

 

막스 갈로는 나폴레옹을 현대적 의미에서의 정치적 커뮤니케이션의 창안자였다고 평가한다. 나폴레옹은 여론을 정복해야만 한다는 것을 아주 일찍부터 이해했다. 프랑스혁명을 결국 여론의 승리로 봤다는 것이다. 나폴레옹은 여론이 자신의 의도대로 흘러가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적대적인 신문을 검열하고, 폐간했다. 그는 이탈리아 전장에서도 《이탈리아군 통신》《프랑스 파트리오트》《이탈리아에서 본 프랑스》《보나파르트와 덕망 높은 사람들의 신문》 같은 신문의 창간을 재정적으로 지원했다. 군내에서도 소식지를 만들기도 했다. 일종의 여론조작을 했던 것이다.”(본문 251~252쪽)

 

르네상스적인 인문주의자, 조조!

권모술수와 잔혹함의 대명사로 악명 높은 조조지만 입체적으로 바라본 그는 숱한 전장을 빠지지 않고 누볐던 용장이며, 관용에 바탕을 둔 용인술의 대가였다. 조조의 압도적 능력은 시대상황에 적합한 유연한 임용 기준을 세웠다는 것이다. 어지러운 혼란기에는 인품 보다는 전장에서의 공로와 능력이 중요하기에 장수로서 맡은 임무를 다할 수 있는 사람, 나라를 다스리고 군사를 움직이는 전략과 전술에 뛰어난 자가 있으면 출신에 상관없이 언제든 기용했다. 그에 비해 덕장의 화신이라는 유비는 동맹관계를 맺었던 사람들과 끊임없이 반목했다. 조조를 비롯해 공손찬·도겸·원소·유표·손권·여포 등과 유비가 먼저 의탁해 동맹관계를 맺었지만 나중에는 이들과 모두 대립한다.

또한 조조가 『삼국지』에 등장하는 주요인물 중 교양이 가장 풍부한 인물이었다는 점도 재미있다. 서예, 장기, 음악, 건축술, 기계제작에까지 다양한 범위의 지식을 섭렵했던 조조. “당시 그를 필적할 수 있는 사람은 제갈공명 정도에 불과했으니, 그만큼 조조는 인문, 자연, 기계공학 등 풍부한 교양을 자랑하는 르네상스적인 인문주의자”(본문 65쪽)였다.

 

이밖에도 미모로 이집트와 로마의 최고권력자들을 홀리고 색정에 가득 찬 여자로 기록된 클레오파트라가 사실은 이집트의 독립과 번영의 꿈을 놓치지 않았던, 교양과 재능이 넘치는 여왕이었다는 것. 46년간 대제국을 호령한 중국사 유일의 여황제 무측천 역시 권력을 잡기 위해 자신의 자식을 죽인 악독한 여제 혹은 수십 명의 남자 첩을 거느린 색정의 노인네로 알려졌지만 그녀가 황제로 있을 당시는 민중에게는 최고의 평화로운 시대였고, 중국의 대외 관계가 편안하기 그지없었다는 것. 무자비한 애꾸눈의 폭군으로 알려진 궁예가 사실은 맨몸으로 후고구려를 세우고 한반도 3분의 2 영토를 지배했던 탁월한 장수이자 미륵사상이란 민중해방 사상의 꿈을 갖고 있었다는 것. 청해진의 장수 정도로 알려진 신라의 장보고는 도자기 제조업과 무역업으로 동아시아를 휘저은 해상제국의 CEO였으며 우리 역사상 최초로 역성혁명을 기획해 성공시킨 조선 왕조의 기획자이자 설계자였던 정도전이 5백년 조선 역사에서 반역자로 남게 된 이유,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전』의 저자이자 허난설헌의 동생으로 알려져 있는 허균이 조선사 최다 복직과 파직을 거듭한 이단아이자 조선왕조의 기피인물 제1호였다는 것. 희대의 바람둥이라는 카사노바는 7개국어에 능통하고 온갖 재능을 갖춘 팔방미인형의 쿨가이였다는 것. 구국의 여걸로 알려진 명성황후의 이면에는 민씨 척족을 위해서만 고도의 정치력을 발휘했다는 것. 한일병탄을 주도한 것으로 알고 있는 이토 히로부미가 사실은 일본 정계에서는 온건파였다는 것 등. 저자는 제3지대의 시선에서 견인된 역사인물 및 그들을 둘러싼 갖가지 정황적 면면들이 평면적인 역사 상식에 공간과 양감, 입체감을 불어넣는다.

 

2. 책 속으로

 


 

“사실 근본적인 역사의 흐름을 논외로 한다면 진 제국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은 환관 조고의 전횡과 이에 휘둘린 2세 호해의 어리석음이었다. 그렇다면 그렇게 치밀하고 냉정한 성격이었던 진시황이 왜 2세 체제를 준비하지 못했던 것일까? 역사가 기록하듯 이는 2인자였던 환관 조고의 최고권력자에 대한 정보채널 독점과 이를 이용한 정보 왜곡에 있었다.”(28쪽)

 

여자라는 것에 덧붙여 클레오파트라는 2,000년 역사 동안 서구에 지배받아온 동양의 왕이었다. 피지배민족의 왕이었다는 것이 무한정의 오해와 편견 속에 놓이게 한 것이다.”(38쪽)

 

“조조는 그래도 역사의 분칠이 가장 많이 벗겨진 인물이다. 현대에 와서 『삼국지』에 등장하는 인물평가는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의 분칠과 유교적 사관을 벗어나, 사서(史書)에 입각해 조조를 객관적이고도 공정하게 보고자 하는 쪽이 주류를 이루고 있기는 하다……그러나 조조는 잔혹무비보다 ‘관용’의 용인술에 능한 리더였고, 단기간의 권모술수보다 집권 이후 통일제국의 건설을 위해 20여 년간 대의명분과 국가기반을 쌓아 나갔던 전략가였다.”(63쪽)

 

“강국 당제국을 폐하고 주(周) 제국을 세웠다. 그리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고종의 황후로서 섭정하던 때를 포함해 46년간 대제국을 호령한 최고권력자였다. 그러니 ‘통쾌! 여성사’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런 통쾌한 여성의 역사는 1,300여 년 동안이나 왜곡 속에 묻혀 있어야 했다. 왕위 찬탈과 여성 집권이라는, 유교의 이념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무측천의 시대를 유학자들은 그대로 기록하기 힘들었다. 대신 유학자들은 그를 무자비하고 음란한 천하의 악녀로 기록하고, 중요한 부분은 삭제했다. 그러기에 그의 시대는 냉혹한 권력투쟁의 기록만 전면에 나올 뿐 치세의 중요한 내용은 역사 속에서 누락되기에 이르렀다.”(82쪽)

 

“일본 규슈(九州)대의 하마다 코사코 교수는 “장보고가 해상치안을 유지함으로써 서일본 해안의 백성에게 대외적 안심감을 주어 도착하는 신라선이나 거주하는 신라인에 대한 의심이나 경계심을 발생시키지 않았다. 그래서 중계무역이 활성화되었다. 전체적으로 서해의 안정은 신라·당·일본에 경제적, 사회적 안정을 가져다 주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중국내 장보고 연구의 권위자인 양저우(楊洲)대 주장(朱江) 교수는 “9세기 초에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고 조직적으로 무역활동을 펼친 사람은 장보고뿐”이라고 평가했다.”(117쪽)

 

“경기·강원·충청 일대 실력자들의 대부분을 정복하거나 귀순시켜 한반도의 3분의 2를 자신의 세력권 안에 두었던 궁예. 그는 과연 왜 몰락한 것일까? 정사에서 말하듯 말기에 들어 그가 변태적 성격파탄을 일으켜 포악하고 잔학한 정치를 일삼았기 때문인가? ”(134쪽)

 

“그는 우리 역사상 최초로 혁명을 기획해 성공시킨 인물이다. 그러나 실패한 혁명가 대다수가 그러하듯 그의 말로 역시 비장했다. 조선 왕조의 기획자이자 설계자였던 그는 동시에 500년 조선사의 역적으로 인생을 마쳤다. 100년 뒤 이탈리아를 무대로 활동했던 마키아벨리의 정치적 역정과 사상보다 훨씬 더 현실적이고 복합적인 이론을 논했던 정도전이었다.”(150쪽)

 

허 균은 현실을 넘어 새로운 진보의 세계까지 보았다. 당대 최고의 명문가에서 태어나 평민 서얼 출신이나 천민의 시각에서 새로운 사회의 모습을 그려낸 혁명가. 남녀차별이 정당화되는 현실에서 동등한 인격과 ‘정욕’의 소유자로서의 여성의 지위를 인정한 인간평등주의자. 서경덕의 학통을 이어받은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불교와 도교 그리고 서방의 새로운 세계관인 천주교까지 넘나든 지적 호기심에 가득 찬 인문주의자. 현실에 바탕을 둔 군사론과 정치개혁론을 펼쳤던 현실주의적인 정치학자. 그런 의미에서 허 균은 자기 시대를 훌쩍 뛰어넘은, 그를 미워했던 신료들마저 인정했듯 ‘인간 이상의 인간’이었다.”(188쪽)

 

“광해군은 달랐다. 15년간의 재위기간 내내 복잡다단한 국내외 정치상황에 대응해 자신의 확고한 정치노선을 끌고 가다 반대세력의 쿠데타를 맞아 한순간에 권좌에서 밀려났다. 그의 치적이 만만찮아 쿠데타에 성공한 반란세력들은 조선이 망하는 순간까지 광해군의 치적을 폄하하고 은폐하기 위해 『선조실록』을 수정하고, 『광해군일기』의 사초를 왜곡하는 등 갖은 수를 써야 했다.”(195~196쪽)

 

“성과 관련해 오늘날 전하는 카사노바의 이야기는 그나마 최음효과를 일으키고, 정력을 북돋울 요리 몇 가지와 그가 애용했다는 콘돔에 관련된 것뿐이다. 그러나 카사노바의 여인 편력기는 가벼운 마음으로 슬쩍 듣고 씩 웃으면 끝날 것 같은 가벼운 성적 무용담이 아니었다……감각본위주의자인 그의 파격적 존재론은 사실 만만찮은 철학적 함의를 지니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215~216쪽)

 

“막스 갈로는 나폴레옹을 현대적 의미에서의 정치적 커뮤니케이션의 창안자였다고 평가한다. 나폴레옹은 여론을 정복해야만 한다는 것을 아주 일찍부터 이해했다. 프랑스혁명을 결국 여론의 승리로 봤다는 것이다. 나폴레옹은 여론이 자신의 의도대로 흘러가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적대적인 신문을 검열하고, 폐간했다……군내에서도 소식지를 만들기도 했다. 일종의 여론조작을 했던 것이다.”(251~252쪽)

 

“과연 명성황후의 정치력은 놀라운 것이었다. 완고한 고집으로 인해 20년간 권력 주변을 맴돌아야 했던 대원군과 달리 명성황후는 상황 변화에 따라 기민하게 정치적 처신을 바꿔왔다. 물론 ‘정치노선’이란 것은 찾아볼 수 없고, 오직 외세와 조정 내의 힘의 역학관계를 파악하는 데 동물적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이런 동물적 감각을 백분 활용해 명성황후는 20년 동안 실권을 쥘 수 있었다.”(270쪽)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 침략의 원흉으로 알려졌지만, 사실 그는 당시 일본 정계에서 비교적 온건파에 속했던 인물이다. 이토는 메이지 유신을 주도한 사이고 다카모리가 주창했던 정한론(征韓論)을 반대했다. 물론 조선 정복 자체를 반대했던 것은 아니고, 시기를 내정개혁 뒤로 미루자는 의견이었지만 말이다. 그는 이후 청일전쟁 뒤의 삼국협상, 러일전쟁 결정과정, 대한정책에서 대외 세력관계를 면밀히 계산한 뒤 무리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일처리를 해왔다.”(296쪽)


 

3. 저자 소개

 

지은이 최용범

1968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경신고와 성균관대 동양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그가 대학입학시험을 마치고 간 곳은 도서관. 학습실로써의 도서관이 아닌 책 가득한 도서관에서 사람들 이야기에 탐닉했다. 그가 정작 하고 싶었던 공부는 제도적으로 분화한 분과학문이 아닌 사람 그 자체를 연구하는‘인간학’이었다. 80년대 열병과도 같았던 열정의 시대에 정작 하고 싶은‘인간학’대신 사회를 바꾸는 혁명 공부와 얼치기 운동꾼으로 대학생활을 보냈다.

졸업 후 시사월간지인《사회평론 길》의 취재기자로 일하던 그는 지면에서나 대하던 인물들을 직접 만나가면서 세상과 사람에 대한 인식의 폭과 깊이가 조금은 넓어지고 깊어졌다. 그가 정말로 하고 싶었던‘인간학’은 직장생활을 접고 프리랜스 작가와 출판기획자로 일하면서부터였다. 우연히 학창시절 인연을 쌓았던 선배, 동기와 함께 역사인물을 인터뷰해 책을 내자는 기획을 하게 되었다. 공동작업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유일하게 ‘중국사의 위탁경영자-진시황 인터뷰’원고를 썼던 그는 이 원고를《월간중앙》에 팩스로 보냈고, 1년 뒤 연재 제안을 받았다. 1년 6개월간 연재했던 게 <역사인물인터뷰>다. 이를 시작으로『하룻밤에 읽는 한국사』『하룻밤에 읽는 고려사』『난세에 간신 춤춘다』(공저) 등을 펴내며 어줍잖게‘역사작가’란 간판을 내걸고 밥벌이를 했다. 특히 30대 초반 겁 없이 썼던『하룻밤에 읽는 한국사』는 초판 발간 이래 10년간 30만부가 꾸준히 팔리는 과분한 반응을 얻었다.

지금도 그는 사람 이야기가 가장 재미있고, 궁금하다. 엄밀하고, 귀납적인 방법으로 일반화한 역사서 대신 한 시대나 사건을 이끌어나갔던 인물들은 누구며, 그들은 무슨 생각을 가졌는지, 밥벌이는 무엇으로 했으며, 어떤 옷차림을 했는지 등등 살아있는 모습이 궁금하다. 또 일반적인 역사서에 기록된 그대로의 인물인지도 재수사하거나, 보강 취재를 하고 싶다. 역사란 결국 사람과 사람이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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